종목소개
사계절 즐거움이 있는 아이스링크 ! 강릉빙상센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컬링 ]

개요

빙판 경기장 위에서 둥글고 넓적한 스톤을 하우스라고 하는 표적을 향해 미끄러뜨려서 득점을 겨루는 겨울 스포츠로 네 명이 한 팀이 되어 상대 팀과 겨룬다. 한 명의 선수가 스톤을 미끄러뜨리면 두 명이 스톤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브룸(broom)이라는 솔로 솔질을 하여 스톤이 목표한 곳으로 가도록 한다. 모두 10엔드를 치르며 1엔드에 두 팀이 교대로 하나씩 8번 스톤을 투구하여 목표한 곳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스톤의 팀이 득점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동계 스포츠 종목 중 가장 정적이면서도 긴장감은 큰 종목이다.

역사

다른 동계 스포츠 종목에 비하여 낯선 종목이나 역사는 매우 깊다. 중세시대 때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되었고, 1541년 2월 렌프루셔(Renfrewshire) 주의 패이슬리 애비에서 첫 공식 경기가 열렸다. 컬링이라는 용어는 스톤이 휘어져(curl) 나가는 모습에서 유래하는데, 이때 으르릉 하는 소리가 나 ‘으르렁거리는 놀이(the roaring game)’라고도 불렀다. 컬링은 캐나다로 이주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에 의하여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1807년 로열 몬트리올 컬링 클럽이 창단되었는데, 이는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전통 있는 스포츠 클럽이다. 미국에서는 1830년 첫 컬링 클럽이 창설되었으며, 유럽에서는 19세기 말에 이르러서 스위스와 스웨덴 등지에 컬링 클럽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국제대회는 꽤 늦게 시작되어 1959년 스코틀랜드 포커크와 에든버러에서 개최된 스카치 컵(Scotch Cup)이 최초의 컬링 챔피언십이다. 첫 대회에서는 남자부 경기만 열렸고, 캐나다 팀이 우승을 차지하였다. 스코틀랜드 로열 칼레도니안 컬링 클럽에 기원을 둔 세계컬링연맹은 1965년 창단되었으며 스코틀랜드 퍼스에 본부를 두고 있다. 1998년 나가노 대회 때부터 동계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미 1924년 제1회 사모니 대회 때에도 컬링 경기가 열린 것으로 확인되어 2006년 2월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사모니 대회 때 금메달을 획득한 영국과 아일랜드, 은메달 2개를 획득한 스웨덴, 동메달을 획득한 프랑스에 각각 해당 메달을 수여하였다. 또한 이와 함께 컬링을 올림픽 영구 종목으로 결정하였다. 2014년 소치 대회까지는 남자부, 여자부 각 1개씩 2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었으나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부터 남녀 각 1인이 한 팀이 되어 겨루는 믹스 더블이 채택되어 모두 3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다.

한국 컬링의 역사

우리나라에 컬링이 도입된 것은 1997년 무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유치하면서부터이다. 대회 준비를 하던 1994년 1월 대한컬링연맹이 창립되었으며, 이후 세계컬링협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로 여러 차례 컬링 강습회를 개최하고 장비도 대거 들여왔다. 이러한 노력에 의하여 2001년에는 국제 대회인 아시아 태평양 컬링 선수권 대회를 개최하여 컬링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여러 국제 대회에 선수를 파견하여 컬링의 저변을 확대해 나갔는데, 2001년 아시아 태평양 컬링 선수권 대회에서 여자 팀이 우승을, 그리고 2002년 뉴질랜드 퀸즈타운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컬링 선수권 대회에서는 남자 팀이 우승을 차지하였다. 2006년에는 전주에서 세계 주니어 컬링 선수권 대회를 개최하였고, 2009년에는 강릉에서 세계 여자 컬링 선수권 대회를, 그리고 전주와 의성, 춘천에서 아시아 태평양 컬링 선수권 대회를 각각 개최하였다. 컬링 전용 경기장은 경북 의성과 서울 태릉 두 곳에만 있었으나 제2 선수촌 컬링장과 강릉 2018올림픽 컬링 연습장 등이 건립되어 향후 컬링이 더욱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국내 컬링 선수는 1,000명 이내이고 동호인은 2,000여 명이 있으며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김은정이 이끄는 여자 대표팀이 세계적인 강호들을 잇달아 격파하며 은메달을 차지하여 한국 컬링의 역사를 새로이 썼다. 이는 컬링의 불모지에서 거둔 성적이라서 기적이라고 할 만한 쾌거로 향후 더 큰 발전이 기대된다.

[ 쇼트트랙 ]

경기의 해설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의 경기는 북미와 캐나다의 국경에서 발생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오래 전부터 성행하였다. 한국은 1983년 일본에서 개최된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남녀 1명씩 출전하였으며, 1986년 제 1회 동계 아시안게임에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종목이 정식으로 채택되면서 1985년에 한국대표팀이 최초로 구성되었다.

한국팀의 역대 동계 올림픽 성적은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에서 2006년 이탈리아 토리노까지 금메달 17개, 은메달 7개, 동메달 5개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 경기는 60M×30M의 실내 아이스링크의 1바퀴가 111.12M인 트랙에서 500M, 1000M(4명), 1500M(6명), 3000M(6~8명)의 선수들이 조 편성되어 경기에 임하는 기록보다는 순위를 중요시하는 경기이다.

각 종목은 예선(HEAT), 준준결승(QUARTER FINAL), 준결승(SEMI FINAL), 결승(FINAL)의 경기로 이루어지며 각 경기에서 다음 경기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1위와 2위의 선수만이 진출하기 때문에 기록보다 순위를 중요시한다.

우리나라는 현재 서울을 중심으로 춘천, 강릉, 대구, 경기, 전주, 광주, 인천, 부천, 대전 등 각 지방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올림픽 및 세계선수권, 기타 국제대회에서 세계를 제패하는 인기 있는 동계종목 중의 하나이다.

[ 피겨 ]

서구식의 스케이트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한국 전통 스케이트로 짚신 바닥에 대나무 쪽을 댄 ‘대발’이라는 것이 있었다. 겨울이면 얼음이 언 한강이나 대동강의 양기슭에 대발막을 세우고 대발과 대발막대라는 스틱을 빌어 氷上渡江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1890년대 중반, ‘빙족희(氷足戱)’라는 이름으로 서구식의 스케이트가 조선에 처음 선보이게 된다. 경복궁 향원정 못 위에서 '얼음 위를 나는 기술'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던 고종과 명성황후를 위해 외국인들이 시연을 했던 것이다.

영국의 왕립 지리학회 최초 여성 회원이었으며, 1894년~1897년 사이 한국에 머물렀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그의 저서 "조선과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에서 경복궁 향원정에서 열린 스케이트 파티에 초대를 받아 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곳으로 그녀뿐 아니라 조선에 있는 전체 외국인들이 모여 들었으며, 왕과 왕비는 유럽인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친절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내외의 법도 때문에 향원정에 발을 내리고 밖에서는 보이지 않게 한 채 스케이팅하는 모습을 숨어 구경 하였으며, 남녀가 사당패와 색주가들처럼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모양에 대해서는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보아 서구의 피겨 스케이팅이 처음으로 조선에 선을 보인 것이 바로 이때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한국에 근대적 운동경기가 보급된 것은 대부분 대한제국시대(1897-1910) 였다. 주로 황성 기독 청년회(YMCA)의 선교사를 통해서 보급되었는데, 스케이트도 야구나 정구 등 다른 운동처럼 이때 알려진다. YMCA의 회원이었던 현동순이 1904년 미국의 선교사 질레트로부터 스케이트를 구입하는데, 처음에는 그 용도를 몰라 다시 선교사에게 찾아가 물었다고 한다. 얼음 위에서 지치는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개천에서 타보았으나 처음에는 앞으로 나아가지않아 애를 태웠으며,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 때의 스케이트는 오늘날과 달리 앞뒤가 짤막한 것이었다고 한다. 보통의 구두에 나사못으로 조여 다는 것으로 앞 굽은 굽어져 있고 날 두께가 두꺼워 지금의 피겨 스케이트와 비슷하였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1929년, 이길용 기자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조선체육계의 과거 10년 회고1]에 기재된 기사로, 그 동안 스케이트 도입시기에 관한 여러 가지 설 중 가장 정확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렇게 도입된 스케이트는 1910년 들어서면서 일반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고 1920년대에 들어서는 동아, 조선일보등에서 주최한 각종 빙상 선수권 대회, 교내 빙상운동회가 성황리에 열리게 된다. 그러나 주로 스피이드 경기 뿐이었지 피겨 활동은 미미했다. 그러다가 1924년 1월 일본에서 유학 후 귀국한 李一의 주도로 [피규어 스케잇 구락부(F.S.C)]가 탄생하게 된다.

창경원의 작은 연못에서 이일, 연학년, 박영진, 김철용, 박정서, 박명진, 장지원, 박희진, 이렇게 8명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던 이 모임은 외국 서적을 사들여 피겨에 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특히 지금은 종목에서 없어진 스쿨 피겨(컴퍼서리)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였으며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생소했던 페어나 아이스 댄싱에 대해서도 알고자 했다. 1924년 2월 [피규어 스케잇 구락부]의 발족 당시의 회원은 8명이었으나 더 많은 회원들이 가세하면서 남자 선수들끼리였지만 페어나 아이스 댄싱도 곧 할 수 있게 되었다(당시 여자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구락부가 발족된 이후 기록상으로는 처음으로 1925년 [제1회 전조선 빙상대회]에서 스피이드 경기 중간에 李一선생의 피겨 시범경기를 갖게 된다. 또한 서울시내 관훈동에 사무실도 내었으며, 1928년에는 용산 철도국 스케잇장에서 동경제대 스케이트 원정단과 피겨 친선경기도 한다.

1930년대 들어서는 경성 의학전문(현 서울의대)이나 경성약전(현 서울대 약대), 세브란스 의전 등에서 피겨선수가 나오고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世專의 경우, 한강에서 교내빙상대회를 열기도 한다. 그러나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오직 전쟁 준비를 위한 체육정책을 펴게 된다. 결국 1938년 7월 4일 [조선 체육회]는 강제해산을 하게 되고 피겨 구락부도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면서 각 체육 단체들이 활성화되었으며 자연히 빙상계도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조선빙상경기협회(대한빙상경기연맹의 전신)]가 발족되었으며, 그 후에 한동안 [조선빙상속도협회(스피이드)]와 [조선빙상형활협회(피겨)]로 독자적으로 분리 운영되어오다가 1947년 6월에 이르러 두 협회는 다시 [조선빙상경기연맹]으로 개칭하게 되고, 마침내 국제빙상경기연맹(I.S.U.)에 정식 가입하게 된다. 그리고 1948년 9월에 [대한빙상경기연맹]으로 다시 한번 개칭하게 되면서 피겨의 원로이신 李一 선생이 초대회장으로 추대된다. 또한 만주 하얼빈이나 북경 등지에서 피겨를 배운 김정자, 홍용명, 서신애, 문영희, 김영배, 장영희 등 여자 선수들이 귀국하면서 활기를 띠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들어 한국은 6·25사변으로 또 한번의 큰 시련을 맞게 된다. 특히 최초의 심판카드와 피겨협회 로고를 만든 이세만 선생이 실종되는 등 종전될 때까지 피겨구락부의 활동이 위축된다. 그러나 피겨 사랑이 각별했던 박영진 선생을 비롯한 많은 피겨인들의 일치 단결로 1955년 제35회 동계체전에도 다시 참가하게 되고, 전국 피겨선수권 대회를 열게 되는 등 제 모습을 찾게 된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동계체전 참관은 국민들로 하여금 빙상에 많은 관심을 갖게 해주었으며, 1959년 9월에는 한국 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빙상 무용단 [홀리데이 온 아이스 쇼]가 내한 공연하기에 이른다. 이때 국내 여자 챔피언이었던 조정근 선수가 이 쑈 단에 선발, 출국함으로써 한국 초유의 프로 선수가 탄생한다.

1964년에는 피겨 선수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이 완공된다. 또한 1961년부터 시작한 아이스 카니발도 4년간 계속 공연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1968년에는 한국 피겨선수로서 처음으로 그레노블 동계 올림픽에 이광영(남), 김혜경, 이현주(여)가 이해정 단장의 인솔로 참가한다. 이렇게 꾸준한 성장을 보인 한국 피겨계는 현재까지 동계 올림픽을 비롯하여 세계선수권대회, 유니버시아드 대회, 세계주니어 대회 등에 많은 우수선수를 파견해왔으며, 1991년에는 삿뽀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정성일 선수가 2위를 함으로서 한국 피겨 국제대회 사상 첫 메달을 획득한다. 또한 1968년 이병희, 이해정 선생의 국제심판 자격 획득 이후, 국제심판은 다수 있었으나 I.S.U 심판이 없어 국제대회마다 아쉬움이 컸으나 2001년, 이지희 기술이사가 각고의 노력 끝에 선발 됨으로서 앞으로 한국피겨의 위상은 점점 더 높아지리라 기대된다. 또한 박빛나(여) 선수가 이번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함으로써 기술면에서도 많은 발전을 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 스피드 스케이팅 ]

빙상경기의 기원

빙상경기의 기원은 추운 북방의 원시인들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교통의 수단으로 개발한 도구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빙상은 육상이나 투기 등과 같이 인간의 생활 속에서 필요에 의한 자연 발생적인 신체 활동이라 정의할 수 있다. 빙상의 역사는 여러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의 형태와 그 자료를 분석, 검토하여 빙상의 발달과정을 추측할 수 있다. 러시아의 파닌에 따르면 석기시대 동굴 속에서 발견된 유사 이전의 유물 중에 동물의 뼈로 만든 썰매 모양의 탐빙구가 발견되었는데 크기, 모양, 마멸된 바닥 등으로 보아 빙상에서 활주한 용구였음이 증명되었다. 또한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보관 중인 수골제를 끈으로 묶어서 신에 달게 되어있는 스케이트나 스칸디나비아의 원주민과 에스키모인들입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마골제 들의 스케이트에서 그 기원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스케이트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구미 여러 나라에서 각종 국제대회가 개최되고 각종 올림픽대회가 개최되어지기 시작한 19세기 이후이다.우리나라에서 스케이트를 처음으로 구입한 사람은 현동순씨라고 하는데 그는 1908년 미국의 길렛트 씨로부터 경매장에서 구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에는 스케이트를 구입하기 힘들었으므로 목판에 칼이나 철사 등을 붙이고 그 목판을 신 밑에 끈으로 달아서 스케이트의 한 형태로 놀이를 즐겼다.이것은 스케이트가 아니라 빙상의 유희 및 오락의 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 후 1912년 경성일보사가 용산부근에 빙활장을 만들고 무료로 개방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스케이트장이다. 또한 1915년에는 중국의 빙상단을 초청하여 의주농업학교 부근의 경빙장에서 스케이트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최초의 국제빙상 경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스케이트가 국민에게 정상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이후라 할 수 있다. 1921년 12월에 조선체육협회가 명동부근에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개방함으로써 일반인의 스케이트에 대한 관심은 점차적으로 고조되어 갔으며 스케이트의 흥미 및 기술의 보급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1923년 대동강에서 시작된 전조선 빙상경기대회, 1935년에 한강에서 개최된 조선 여자 빙상 경기대회, 1933년의 전조선 중등학교 빙상대회등 많은 대회가 해가 갈수록 많이 개최되었고 그 외에 전 일본 빙상대회가 여러 형태의 대회 이름으로 열리게 되었다.

그 중 상당수의 대회는 아시아 빙상대회로 불리워질 만큼 그 규모가 방대하였으며 우리나라 선수들은 각 종 대회에 참가하여 단체우승과 개인우승 등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 1932-1938년까지는 우리나라 빙상계가 가장 전성기라 볼 수 있는데 이 당시에 일본과 경쟁하여 6년간이나 제패하는 큰 쾌거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후, 1941년에는 한국의 편창남 선수가 19세의 어린 나이로 전일본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여 한국 빙상계를 놀라게 하였으며, 1943년에는 이효창 선수가 편창남 선수를 이어 전일본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기 전까지 한국인이 전일본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이성덕, 최용진, 김정연, 박윤철, 편창남, 이효창등 6명이 무려 8회에 걸쳐 우승하여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한국빙상선수가 최초로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1936년 독일의 칼뮤슈에세 개최된 제 4회 동계올림픽 대회인데 김정연, 이성덕, 장우식 선수가 참가하였다. 그러나 태극기를 달지 못하고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한 김정연 선수는 10,000m에서 18분 2.7초로 일본 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세계 13위를 차지하는 좋은 기록을 남겼다.

1948년 제 5회 동계 올림픽이 스위스 산모르츠에서 개최되었는데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뜻 깊은 대회였다. 1956년 이태리, 코르티나 담배죠에서 거행된 올림픽은 김정순, 편창남 선수 등은 이 대회에 참가하여 한국 신기록을 갱신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며 새로운 한국빙상의 면모를 과시한 대회였다.

그 후 , 1964년 제 9회 인스부르크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최남연 선수의 등장은 장거리계에 있어서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게 된다. 최남연 선수는 무명선수로 제 2부 선수권대회에서 종합우승을 하여 1년 사이에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제1부 선수권대회 까지 종합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달성하였다. 그 당시 국내대회는 주로 한강철교 밑에서 거행되었는데 빙질도 양호한 편이었다.

1965년에는 제1회 한?일 친선경기가 지금이 효창운동장에서 열렸으며, 1967년 2회 대회는 일본에서 개최하였다. 이 당시의 스케이트는 기술보다는 힘의 스케이트를 중시하였는데 이 대회에 참가한 선수로는 정충구, 조흥식, 이익환 등이었다.

그 후 한국 빙상계는 뚜렷한 간판선수가 없다가 이영하 선수의 출현으로 한국 빙상계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영하 선수는 1976년 1월 17-18일에 개최된 세계 주니어 선수권대회에서 세계 주니어 신기록을 수립하며 종합우승을 차지하는 등 그가 은퇴할 때까지 국제 선수권대회에 여러 번 참가하여 한국 빙상을 세계 속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각시켰으며 그가 은퇴할 때까지 수립한 한국신기록은 무려 51회나 된다.

이영하 선수의 뒤를 이어 1987년 네덜란드에서 거행된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한국의 배기태 선수는 500m에서 37초 04로 1위를 차지하며 한국의 새로운 간판 스타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배기태 선수는 1990년 2월 노르웨이 트롬소에서 거행된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대회에 종합우승을 차지하며 금메달을 획득하여 한국 빙상계의 새로운 신기원을 이룩하였으며 1990년 제 2회 동계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도 10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영광스런 은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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